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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역사 공부를 하면서 '악녀'라는 단어를 그냥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장희빈 한 명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SBS 새 드라마 <멋진 신세계>는 그 복잡한 감정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역사 속 악녀가 21세기로 타임슬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그렸습니다. 저는 이 설정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장희빈, 저는 그녀가 마냥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번씩 마주치는 이름이 있습니다. 장희빈이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그 이름을 접했을 때는 그냥 '왕의 여자'쯤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하나씩 파고들수록 이야기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장희빈은 조선 숙종의 후궁이자 왕비로, 정1품 희빈(禧嬪)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여기서 정1품이란 조선 품계 중 가장 높은 등급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후궁 가운데 최고위 자리입니다. 든든한 외척(外戚) 하나 없이 그 자리에 올랐다는 점이 지금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만큼 이례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여기서 외척이란 왕실과 혼인으로 연결된 모계 혹은 처가 쪽 권력 집단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여러 사료를 훑어봤는데, 그녀는 당쟁(黨爭)의 한복판에 던져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당쟁이란 조선 후기 붕당 간의 정치 투쟁을 뜻합니다.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장희빈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올라가기도,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악녀로 기록된 이면에 정치 게임의 희생양이라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시각이 마냥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 장희빈: 조선 숙종의 후궁, 정1품 희빈까지 오른 실존 인물
- 외척 없이 권력 정점에 오른 사례 — 조선사에서 극히 드문 경우
- 남인·서인의 당쟁 구도 속에서 정치적 도구로 소비된 측면도 존재
-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비극적 결말 — 기록상 1701년(숙종 27년)
타임슬립 설정, 이게 왜 지금 먹히는지 직접 느껴봤습니다
이 드라마는 사극 촬영 현장에 조선 시대 악녀가 불시착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 대하여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또 타임슬립이야?' 싶었습니다. 그 정도로 최근 몇 년 사이 타임슬립 장르가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설정은 결이 다릅니다.
타임슬립(Time Slip)이란 특정 인물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다른 시대로 이동하는 서사 장치입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활용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로 진화했습니다. 출처: SBS 멋진 신세계 공식 페이지에서 확인한 설정에 따르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약을 받는 순간 21세기 사극 촬영 현장의 무명배우 신서리로 깨어납니다.
여기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지점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무명배우의 몸'이라는 낙하지점입니다. 집도 없고, 배경도 없는 곳으로 떨어진다는 설정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와닿았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사약을 받은 여인이, 다시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구조는 제 경험상 이렇게 대비가 강렬할수록 캐릭터의 성장 서사가 더 깊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맞닥뜨리는 상대가 차세계,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 불리는 재계의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이라는 설정도 절묘합니다. 앙팡 테리블이란 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를 뜻하며, 관습을 무시하고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인물을 가리킵니다. 조선의 악녀와 현대의 괴물이 한 공간에서 부딪히는 구도는 이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충돌입니다.
구원 서사, 악당 두 명이 서로를 구한다는 반전
제가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를 처음 읽었을 때 딱 한 문장에서 멈췄습니다. '동화 속 악당 같은 두 사람이 만나 행복을 찾아낸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보통 구원 서사(救援敍事)는 선한 주인공이 상처 입은 누군가를 구하는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구원하는 쪽도, 구원받는 쪽도 악당이라는 설정입니다.
구원 서사란 결핍이나 상처를 가진 인물이 관계나 사건을 통해 회복되는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이 공식은 오랫동안 검증된 감정 공식입니다. 다만 두 주인공이 모두 '악' 쪽에 놓인 경우는 훨씬 드뭅니다. 그래서 이번 설정이 저는 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역사 속 인물을 보면 악녀로 낙인찍힌 여성들 중에는 실제로 구조적 한계 안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던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미실, 장희빈, 정난정이 그렇고, 서양으로 가면 마타하리, 클레오파트라, 메데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역사에 '악녀'로 기록된 데는 그들이 활동한 시대의 젠더 권력 구조(Gender Power Structure)가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젠더 권력 구조란 성별에 따라 사회적 역할과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체계를 말합니다. 출처: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서도 조선 여성과 권력에 관한 관련 연구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이런 역사 인물들의 기록을 찾아보면서 느낀 건,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선택지가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드라마가 그 지점을 건드릴 수 있다면,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 벌은 마땅한가
솔직히 저는 역사 공부를 처음 할 때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건 당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는 것, 그게 맞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더 들여다볼수록 그 확신이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예단(豫斷), 즉 미리 내린 판단이 역사 인물을 바라볼 때 얼마나 왜곡을 만들어 내는지를 제가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는데, 외모가 출중하거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주변의 시선이 더 가혹해지는 경우를 꽤 봐왔습니다. 장희빈 역시 그런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드라마 속 무명배우 신서리가 아무런 기반 없이 21세기에 던져지는 장면은, 제게 이런 질문으로 들렸습니다. '뒷배 없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뒷배 없이 정1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설정 안에 오히려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시스템 밖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
성장과 구원을 '뜨겁고, 거칠고, 아름답게' 전하겠다는 기획 의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세 단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거칠지 않은 구원은 가볍고, 뜨겁지 않은 성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드라마가 그 균형을 어떻게 잡아내는지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 역사 속 악녀들의 공통점 — 선택지가 제한된 구조적 환경 속에 놓였던 인물들
- 드라마가 던지는 핵심 질문 — 잘못과 벌 사이에 놓인 맥락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현대적 재해석의 가치 — 사극 악녀를 21세기 무명배우로 치환해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읽기
역사를 공부하면서 악녀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드라마까지 찾아보게 된 저로서는 이 기획이 반갑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각자의 삶에 작은 의미로 남을 수 있다는 제작진의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 악녀를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장희빈을 비롯한 역사 속 인물들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야기의 결이 훨씬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SBS 악녀들의 세상이 그 질문들을 어떻게 풀어가는지, 저도 끝까지 따라가 볼 생각입니다.
참고: https://programs.sbs.co.kr/drama/wickedworld/about/88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