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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배우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맨 끝줄 소년의 원작은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동명 희곡입니다. 조용히 맨 뒷자리에 앉아 모두를 관찰하던 한 소년이 글쓰기 하나로 어른의 삶을 통째로 침범하는 이야기인데, 솔직히 처음 줄거리를 접했을 때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관찰자가 어느 순간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는 구조가, 읽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을 때 더욱 그랬습니다.
맨 끝줄 소년, 원작 배경
희곡 <맨 끝줄 소년>은 문학 교사 헤르만이 학생들의 장문(長文) 숙제를 채점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장문이란, 단순히 긴 글이 아니라 자유 서술식 글쓰기 과제를 뜻합니다. 주말에 있었던 일을 30분 동안 자유롭게 쓰는 것이었는데, 결과물은 "토요일엔 TV 봤고 일요일엔 아무것도 안 했다"는 수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이런 글쓰기 숙제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와 친구들은 나름 열심히 써서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워낙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다 보니, 글로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훈련 자체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는 걸 이 장면을 보면서 다시 실감했습니다.
저자 후안 마요르가는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박사 출신으로, 실제 중등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한 학생이 시험지에 자신의 삶의 세부 사항을 털어놓은 이례적인 답안을 읽은 것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작품 속 클라우디오가 현실에서 건너온 인물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의 수학·철학적 배경은 작품 전체에 녹아 있습니다. 특히 클라우디오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고집한 '허수(虛數)'라는 단어가 대표적입니다. 허수란 실수 체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수학적 계산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허수라는 것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매개체입니다. 클라우디오의 소설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픽션처럼 보이지만, 헤르만 부부와 라파 가족의 속마음을 끌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였던 것이었습니다.
핵심 분석, 누가 누구를 가르쳤나
헤르만이 클라우디오에게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서사적 거리(narrative distance)'였습니다. 서사적 거리란, 서술자가 이야기 속 인물과 얼마나 가깝게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의미합니다. 헤르만은 제자들에게 "편견 없이 가까이 들여다보라"라고 가르쳤고, 동시에 "서술자의 목소리가 너무 커지면 인물이 묻힌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두 조언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사실 같은 말의 두 면입니다. 인물에게는 가까이 다가가되, 작가 자신의 판단은 한 발 뒤로 빼라는 것이죠.
그런데 정작 헤르만 본인은 수업 시간에 라파를 칠판 앞에 세워 글의 오류를 하나하나 지적했습니다. 교실 전체가 웃음으로 채워지는 동안 라파는 공개적인 수치를 당했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가장 불편했던 이유는, 이게 단순한 가혹함이 아니라 '가르친다'는 명목 아래 이루어진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학생에게 편견 없이 보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선생 자신은 라파를 그렇게 대하지 못했다는 모순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클라우디오는 헤르만이 가르쳐 준 결말의 조건을 스승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합니다. 헤르만이 말했던 "필연적이면서도 예측 불가능하고, 불가피하면서도 놀라운 결말"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가 운영하는 갤러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헤르만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서재에는 빌려줬던 책들이 고스란히 꽂혀 있고, 후아나를 묘사한 마지막 원고가 남아 있었습니다. 헤르만은 공모자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완벽한 피해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희곡이 이 구조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 관찰자는 결국 관찰 대상의 일부가 됩니다.
- 진정한 결말은 이야기 바깥에 있던 독자도 끌어들입니다.
- 문학을 가르치는 행위 자체가 윤리적 위험을 내포할 수 있습니다.
이 희곡이 2012년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인 더 하우스(Dans la maison)>의 원작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출처: IMDb - Dans la maison). 훔쳐보기라는 인간의 본능, 그리고 그 본능이 문학과 만날 때 발생하는 윤리적 긴장감을 프랑스 감독도 포착했던 것입니다.
과외문화, 이 장면이 불편했던 이유
클라우디오가 헤르만에게 "수학 시험 문제를 빼내 달라"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라파가 시험을 망치면 부모가 과외 선생을 바꿀 것이고, 그러면 그 집에 드나들 이유가 사라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이해가 되면서도 동시에 화가 났습니다.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자녀가 시험을 한 번 못 보면 과외 선생을 즉시 교체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집니다. 제 친구가 교사로 근무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가 만난 반은 성적 문제가 아니라 태도 문제가 심각한 아이들이 많았는데, 학부모들은 성적표만 보고 교사를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아이의 현재 수준을 파악하기도 전에 교사를 바꾸는 것이 과연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외 교사 교체 판단 기준에 대해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학습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평균 3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단 한 번의 시험 결과로 과외 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학습 전이(learning transfer)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단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학습 전이란, 배운 내용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과정을 의미합니다.
클라우디오가 "수학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단순한 대사가 아닙니다. 라파 집에 드나들면서 에스테르에게 시를 건네고, 헤르만에게 원고를 쓰는 동안에도, 수학만은 감정 없이 정확하게 작동했습니다. 클라우디오에게 수학은 유일하게 배신하지 않는 관계였던 것이고, 그게 제 경험상 가장 쓸쓸하게 읽힌 문장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맨 끝줄 소년 원작 희곡과 넷플릭스 드라마는 내용이 같나요?
A. 기본 구조와 인물 관계는 유사하지만, 설정이나 결말 연출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원작 희곡에서는 헤르만이 클라우디오의 뺨을 때리는 파국적인 장면으로 끝나지만, 원작을 영화화한 2012년 <인더하우스>에서는 두 사람이 공원 벤치에서 나란히 새 이야기를 상상하는 여운 있는 엔딩으로 각색되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버전은 또 다른 해석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원작 희곡과 함께 비교해 보시면 흥미롭습니다.
Q. 클라우디오가 라파 집에 계속 찾아간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표면적으로는 수학 과외를 명목으로 접근했지만, 클라우디오의 진짜 목적은 라파의 어머니 에스테르와 그 가족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름 내내 공원 벤치에서 그 집을 바라봤다는 고백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라파의 집은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떤 풍경이었습니다. 아버지와 공을 튀기는 장면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독백이 그 빈자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Q. 후안 마요르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후안 마요르가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현대 극작가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력이 그의 작품에 논리적이고 정교한 구조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실제 중등 교사로 일한 경험이 <맨 끝줄 소년>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밝혔으며, 이 작품은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습니다.
Q. '허수'라는 제목이 왜 중요한가요?
A.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는 수학에서 실수 체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복잡한 계산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 개념입니다. 클라우디오의 소설도 마찬가지로, 픽션이지만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였습니다. 헤르만이 제안한 '맨 끝줄 소년'이라는 제목보다 클라우디오가 원한 '허수'가 작품의 본질에 더 가까운 이유입니다.
결론
이 희곡을 접하고 나서 제가 계속 떠올린 건, 제 친구가 "올해 최악의 반을 만났다"라고 했던 그 말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문제아들이 선생님께 대드는 것을 보며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지만,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조용히 앉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사실은 가장 날카롭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헤르만이 클라우디오에게 가르친 모든 것은 결국 클라우디오의 손에서 헤르만 자신을 향해 돌아왔습니다. 가르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쌍방향 관계인지를 이보다 더 정교하게 보여준 작품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와 함께 원작 희곡 텍스트도 꼭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드라마로 먼저 보고 희곡을 읽으면, 같은 장면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